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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 알고 먹자 1부 조선초기부터 중기까지

부위별 알고 먹기

by zoolim 2022. 12. 3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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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돼지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고기를 꼽으라고 하면 당연 대다수가

삼겹살을 떠올리거나 삼겹살이라 말씀을 하실 겁니다.

그만큼 친숙한 돼지고기를 언제부터 먹기 시작 했는지

삼겹살은 어떻게 우리에게 가까워 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돼지고기를 어떻게 언제부터 어떻게 먹었을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조상의 기준을 어디까지 잡을지는 애매 하지만

조선 초기를 기준으로 잡고 이야기를 풀어 가겠습니다.

조선은 보통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로 나뉩니다.

임진왜란 이후로 돼지고기의 활용 시점이 분기를 맞이하고

근대로 들어서는 70년대 전 후로 또 한번의 분기를 맞이 합니다.

그럼 조선 초기부터 보겠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돼지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료와 고 문헌등의 기록을 봤을때 돼지고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보통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대다수의 소비자들과 일반인들은 굉장히 의아해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현재에 이르러 가장 친숙한 고기가 돼지고기의 삼겹살과 앞다리살 즉 전지인데

조상들은 먹지 않았다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이해가 안되는것이 당연하다 봐도 되겠죠.

그렇다면 왜 먹지 않았나

돼지는 잡식성 입니다.

풀 고기 기타 등등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습니다.

사람과 먹는게 비슷 합니다.

가득이나 먹을게 없던 시절에 사람과 먹는게 같은 돼지는 집에서 가축으로 키우기엔

내 먹을거리를 나눠 줘야 되기 때문에 자연히 가축으로써의 가치가 떨어지기에

사육하고 번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가득이나 먹을게 없던 시절>> 이는 조선 초기 백성들이 가난해서가 아닙니다.

고구려 때부터 조선말기 까지 우리의 조상들은 엄청난 대식가 였습니다.

그래서 먹을게 모자랐다고 보는게 맞을거 같습니다.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아주 큰 그릇이 국밥 그릇인 줄 알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재 고증 후 밥그릇이었다는 사실이 밝혀 졌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그래도 백성들의 생활은 나은 편이었으며

과학과 문명이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번성한 시기였습니다.

극심한 가난과 수탈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 말기로 가면서 더욱 심해지고 뺏기는 것도 많아 졌으며,

특히 인조 이후로 극심한 가뭄과 재난등으로 인해 가속화 되다가 영조 정조 시대에 삶이 반짝 나아졌다가

그 이후 엄청난 고난이 시작 됩니다.)

그럼 돼지가 그저 사람과 먹는게 비슷해서 가축으로써 사육이 되지 않았을까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한반도의 토종 돼지는 매우 작았습니다.

돼지만 작았던게 아닙니다.

일반적인 곤충이나 동물들 산짐승 그리고 가축에 이르기까지

여러분들이 지금 알고 있는 가축들의 크기에 비해 매우 작은 사이즈 였습니다.

(물론 곤충과 일반적인 산짐승은 지금도 작습니다.)

단적인 예로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넓은 땅덩어리에 인구가 얼마 안되는 호주의 곤충과 우리나라의 곤충을

비교해 보아도 크기 차이가 어마어마 하고 호주의 토끼 검색해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한반도 토착종의 돼지는 매우 작았습니다.

크기를 가늠해 보자면 지금 알고 있는 살이 어느정도 붙은 진돗개 정도의 사이즈라고

이해 하시면 대략적인 비교가 가능 합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고 먹고 있는 돼지는

유럽쪽에서 개량이 먼저 시작 되어서

품종 이름까지 들어가면 너무 이해하기 힘드니

-짧은 기간에 많이 살이 많이 붙고 덩치가 커지는 종

-새끼를 많이 낳는 종

-질병에 강하거나 맛이 좋은 종

3가지 ~4가지 종을 교배해서 만든 것이 지금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핑크 돼지 입니다.

일반적인 돼지는 6개월 정도만 되면 출하가 되며 새끼는 12-20마리까지 생산이 가능 합니다.

(이베리코의 경우 한반도 토착 돼지와 같은 종은 아니고 결이 비슷한 종이라 이해 하시면 되는데

현재의 일반 백돼지에 비해서 사육기간이 2배에서 3배까지 길고 새끼는 절반 정도 뿐 생산이 안됩니다.

제주도 흑돼지의 경우 일반 백돼지에 비하여 새끼는 절반 사육기간은 2배 깁니다.)

한반도의 돼지의 품종을 이해 했다면 이제 고기로써 주로 무엇을 먹었나 입니다.

우선 닭고기는 제한적으로 먹긴 했습니다.

그리고 사냥등으로 고기를 수급 하기도 했었고요.

또 개고기도 먹긴 했습니다.

개고기를 잠깐 언급 하고 가자면,

외신등이 개고기를 먹는 한국을 조롱하고 폄하 하는 기사들이 종종 올라오고 있고

동물 애호가 단체에서도 개고기를 어떻게 먹냐고 매우 적대시 하며 싫어 하는 분들도 상당히 있습니다.

또한 개고기를 전통 문화라고 이야기 하면서 남의 문화에 왜 간섭이냐,

개인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읽고 받아 들이는 분들에 따라 말도 많고 탈도 많거니와 논란거리도 상당히 있는 주제이기에

지극히 제 주관적인 의견만 남기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개고기는 전통 문화이다 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도 극히 제한적이지만 드시는 분들이 계시는게 사실이고

80~90년대에 보양식이라고 많이 드셨으며 2천년대 들어오면서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 초기에도 많이 또는 즐겨 먹었을까 입니다.

동시대 유럽에선 개를 반려 동물 또는 사냥을 위해 개량해서 사람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이룬 반면

조선에서는 개도 돼지와 마찬가지로 잡식성이기에 반려동물로써 익숙한 동물은 아니었습니다.

사료등을 보면 개를 자주 먹었다 즐겨 먹었다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몇몇 문서들을 살펴 보면 시대상을 여렴풋이 알 수가 있는데

그나마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는 내용은 '목민심서'를 쓴 정약용이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 짐작 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형으로 흑산도에 귀향을 가 있을때 동생인 정약용과

주고 받은 편지가 발견 되면서 역사학자들이 내용을 확인해 본 바

후려서 요약 하면 이런 내용 입니다.

정약전: 동생아 이 곳 흑산도는 먹을게 너무 없다

정약용: 들에 가면 개가 지천에 널려 있는데 개 고기를 드시오

('자산어보' 꼭 보시길 추천 드리는 영화 중 하나 입니다. 배우 설경구의 연기도 압권이거니와

흑백영화 이지만 영화를 다 보고 돌이켜 보면 내가 흑백영화를 봤는지 컬러 영화를 봤는지

분간이 안될정도로 영상미가 뛰어나며, 제대로 된 고증과 함께 시대상과 생활상을 제대로

엿 볼 수 있는 영화 중 하나 입니다.)

정약용은 학자들 사이에선 아는분은 알정도로 개고기에 진심이었던 분입니다.

하지만 내용을 유추해 보건데 사육하는 개가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타 사료들의 내용을 봣을때

개고기는 누군가는 엄청 좋아 했으나

안먹는 사람도 상당 수 안먹거나 못 먹었습니다.

시대의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고기의 수급이 불안정하고 불균형했으며 권력의 독점으로 인해

더 많이 먹는 특정 소비층이 있기는 했으나 일반 백성들도 고기는 먹었습니다.

그 한 종류로써 개고기가 있었고 누군가는 즐겼으나 누군가는 즐기지 않았던 것도 사실 입니다.

김치처럼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하고 자주 먹었고 항상 있었어야 됐던 음식과

압도적 소비가 있던게 아닌 호불호까지 나뉘었던 개고기가

과연 이것을 전통 음식 문화라 정의 할 수 있을까요?

이는 한반도 뿐 아니라 그 당시의 세계의 어느 곳이더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었던

시대상을 본다면 막연히 전통이라고 정의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먹을게 모자라고 비축을 해야 했던 세계 어느지역이라도 고기라는 이유로

개고기를 소비 했다고 유추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 했지만 대체 가축이 사육 되면서 도태가 되었기 때문 입니다.

그럼 도대체 어떤 고기를 주로 먹었나 입니다.

답은 한우 입니다.

지금이야 한우라고 이름이 명명 됐지만

한우라기 보다는 쇠고기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이 될 것 같네요.

지금은 돼지 이야기니 한우에 대한 이야기는 한우편에서 하도록 하고

왜 쇠고기를 주로 먹었냐만 풀고 가겠습니다.

소는 한반도 백성에게 아주 큰 재산이었으며 없어서는 안 될 농사를 도와 줄 가족같은 존재이며,

소가 늙어 병들거나 농사 짓기에 무리가 있는 힘이 빠지는 시기에는

도축되어 고기로써 백성들의 허기를 달래주고

주 단백질 공급원으로써 사람들의 힘을 복돋아 주었습니다.

주로 농사를 지었기에 고기는 질겼고 푹 오래오래 삶아서 고기를 연하게 만들어서

지금의 탕과 국의 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또한 양반가의 집과 모든 집에 화로가 있었습니다.

불은 없어서는 안될 귀한 생활 필수품이었기에

항상 화로에 불을 살려두고 보존 했습니다.

그래서 발달한게 화로에 고기를 구워 먹는 로스구이 문화 또한

조선시대내에서 번성 했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영화 '방자전' 고 김주혁 배우가 주연을 했고 '기생충'의 조여정 배우가 열연을 했었죠.

이 영화를 보면 산에 풍류를 즐기러 가면서 화로를 방자(김주혁 배우)가

지고 따라 올라가서 화로에 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극 중 설정이 아닌 시대상이 반영된 제대로 된 고증의 한 장면 입니다.

이 영화도 적극 추천 합니다.

춘향전을 방자의 시점으로 각색하여 또 다른 시점의 춘향전으로써 재미를 보장 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조선 초기 중기까지 한반도에서는 소고기를 엄청나게 먹었고

엄청난 두수가 사육이 되고 많은 백성이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한우편에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1부의 결론을 내보자면...

이제 조선초기의 시대상과 생활상에 비춰 어떤 고기를 먹었느냐를 말씀 드렸으니,

도대체 돼지고기는 언제부터 알고 먹게 되었냐 입니다.

돼지고기를 알게 되고 먹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 입니다.

임진왜란때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대규모의 군대가 지원을 오게 됩니다.

왜구의 침략도 괴롭고 힘든 일이었지만,

지원군으로 온 명군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 또한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진 않았다는 기록이

선조 당시 정승이었던 '유성룡'이 쓴'징비록'에도 나옵니다.

기록 중 명군이 돼지고기를 이용한 요리 또는 돼지를 찾았다고 되있습니다.

중국은 예로부터 돼지고기를 주로 먹었고 돼지를 이용한 요리 또한 매우 발달 했던 지역으로써,

우리보다 돼지고기를 더욱 좋아하고 자주 즐겼고,

조선에 지원 와서 명군들은 향수병과 더불어 그동안 먹었던 요리를 먹고 싶었고,

그래서 돼지고기를 찾았으며, 그 이후로 돼지고기도 먹는구나 라는 인식을 조선에서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 후기로 넘오 오면서

양반과 특권층의 극심한 수탈과 이권 독점으로 인해 백성들은 점점 가난해 졌고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상 1부를 마치며 2부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소' 에 대한 간략한 내용과

근대에 들어 발달한 돼지고기 소비문화와 발달 과정을 풀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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